꼬박 이틀을 빈씨디에 담고 굽고, 또 구웠다. 생활과 프로페션의 초기화를 위해…
기특한 기계.
다른말로는, 며칠동안 집안에만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.
집에서 별로 움직이지도 않으며,
이것이 허기인지, 속쓰림인지 구분도 못하며,
두 끼니씩이나 먹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만 하다가 어저께 밤 아홉시쯤 라면을 끓였다.
물론 윙윙소리를 내며 씨디를 굽고 있는 랩탑의 소리를 들으며, 방금 전 구운 엠피뜨리를 틀어놓고.
라면이 거의 다 익어가고, 냉장고에서 누렇게 변질되어가던 브로커리 몇알을 넣어 숨죽이기 위해 휘저을 때 쯤.
친구여
우리가 오른 봉우리는
바로지금 여긴지도 몰라
우리 땀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
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
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
우리가 오를 봉우리는
왜 그 가사는 그 때, 바로 그 때, 내 귀를 찔렀을까.
(기억에 이 노래는 두부가 준 거였는데…?)
불어갈 듯 보이는 라면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버리고
명치가 꾹 막히며 바닥에 쭈그려 헛구역질을 몇 번… 했을까
그러고 난 다음에야 울음이란걸 행할 수 있었다. 눈물이란걸 흐르게 할 수 있었다.
마치 급급급체를 했을 때는 목구멍에 손을 넣고 억지로라도 토한뒤 손도 따야 효과가 나듯.
10년전에도 상태는 같았다고 본다.
다만 ‘섭리’를 이해하려는 물음과 거스르려는 욕망을 이제는 애써 피할뿐이다.
난 그러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고,
하나의 몸뚱아리(불어나기도, 줄어들기도 하는)로 태어난 것에 대한 어떤 의미부여도 하지않고 단순히, 반복을하며 목숨을 다 할 수 있길 기도한다.
최근 내가 누군가를 관찰하며 평가했던,
‘어떻게 일터에서 여자를 두 개로 나눠? ‘대상’과 ‘비대상’으로?’
지금보면 그것도, 의미가 없는 거였다.
나도 이제 밖을 좀 나돌아 다니며
나의 ‘대상’으로 삼는 눈빛과, 제스쳐와 말투를 배워야겠다.
그래서 단순한 ‘숨쉬기’에 충실하고,
같지도 않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혼자 주저앉아 울어제끼는
그런 삼십대 독거녀는 되지 말아야겠다.
‘친구여’라고 노래에서 불러주는 아저씨가 날 그렇게 만드는 일은 또 일어나지 않도록.